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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 영화란 무엇인가?] 스크린의 뒷면 - 영화 속 스크린의 잠재적 가능세계들

<씨네21> 창간 30주년 특별 연재 ‘21세기 영화란 무엇인가?’의 세 번째 키워드는 ‘통과하는 공간’이다. ‘20세기의 기억’ , ‘인간의 조건’에 이어 21세기 영화사가 점지한 여러 공간을 탐색하려 한다. 여기서 말하는 공간이란 우리가 영화에서 보게 되는 실제의 풍경과 영화가 촬영되는 장소에서부터, 인간의 신체와 같은 또 다른 맥락의 공간들, 혹은 영화 안팎의 프레임이나 인터미디어처럼 물질과 추상 사이에 존재하는 곳까지 다양하다. ‘통과하는 공간’의 마지막 필자, 김병규 영화평론가는 21세기 영화에 나타난 영화 속 다양한 스크린의 존재와 의미를 포착하며 에드워드 양의 <하나 그리고 둘>부터 토니 스콧의 <데자뷰>를 거론하고, 허우샤오시엔, 구로사와 기요시, 아바스 키아로스타미 등을 언급한다. 영화 속의 스크린이란 공간은, 21세기 영화가 느끼는 불안과 앞으로 가고자 하는 마음을 동시에 느끼게 하는 가능성의 지대다.

<하나 그리고 둘>

스크린의 뒷면

영화 속 스크린의 잠재적 가능세계들

2000년대를 여는 에드워드 양의 첫 영화이자 그의 유작으로 남은 <하나 그리고 둘>에서 화면에 붙잡힌 인물들은 비슷한 증상을 공유한다. 그것은 기억상실이다. 영화의 초반부에 NJ는 무엇을 찾기 위해 집에 들어왔는지 잊어버린다. 그의 딸 팅팅은 버려야 할 쓰레기를 발코니에 두고 그만 잊어버린다. 피로연에 참석해 NJ와 셰리의 재회를 목격한 친구는 엘리베이터를 내려온 목적을 잊어버린다. 어지럽게 뒤얽힌 삶의 회로 속에서 그들은 자꾸만 기억을 잃는다. 더 정확하게는 기억을 잃어버려야만 한다. <하나 그리고 둘>에서 과거를 기억한다는 것은 현재를 구성하는 삶의 조건이 하나씩 부서진다는 위태로운 신호이기 때문이다.

NJ와 셰리가 그들의 과거를 돌아보며 도쿄를 여행하고 있을 때, 타이베이에 있는 팅팅은 친구의 남자친구인 패티와 첫 데이트를 한다. 에드워드 양은 서로 다른 도시에서 벌어지는 두 장면을 평행편집으로 교차한다. 기억상실로 채워진 <하나 그리고 둘>에서 이 순간은 이례적인 기억의 재구성과 반복을 형성한다. 이때 팅팅과 영화를 보고 나온 패티는 한 가지 특별한 이야기를 건넨다. “영화가 생겨난 이후로 인간의 수명이 세 배로 늘었대. 영화를 통해 삶을 두 배 더 경험한다는 거지.” NJ의 재회와 팅팅의 만남은 실패로 돌아간다. 그들은 집에 돌아올 수밖에 없다. 도쿄에서 돌아온 NJ는 셰리를 기억하는 대신 컵을 어디에 두었는지 잊어버린다. 과거는 지워지고 기억상실이 다시 찾아올 것이다. 다만 <하나 그리고 둘>은 패티가 건네준 말처럼 두 사람의 실패한 사랑을 교차하며 평행편집의 계열 위에 또 다른 가능한 삶의 형식을 만들어낸다. 화면에는 재회에 실패하는 NJ의 시간과 첫사랑에 실패하는 팅팅의 시간이라는 두 가지 실패의 시간이 있다. 그리고 그들을 오가는 세 번째 영화의 시간이 있다. 영화는 연인들의 실패를 반복하면서 서로 다른 두 개의 실패를 통과한 세 번째 삶의 시간을 조직한다. 이 시간 속에서 각각의 세계는 모호하게 겹쳐지고 한 가지 시제에 주어진 위상은 분명치 않다.

영화가 건네는 세 배의 삶에 사로잡혀 있던 패티는 여자친구와 부적절한 관계를 맺고 있던 영어 선생을 죽이는 살인자가 된다. 너무 많은 영화에 매혹된 소년은 현실의 단면을 파괴하고 세 겹으로 겹쳐진 삶을 무너뜨린다. 영화를 둘러싼 세 배의 삶은 인간이 영구적으로 거주할 수 있는 세계를 잃어버렸으며 현실과 픽션 사이를 끝없이 오가야 한다는 진단이다. 에드워드 양에게 있어 삶의 매혹과 죽음은 이미지의 앞뒷면을 감싸고 있다. 고등학교 때 갑자기 반했던 이유를 묻는 셰리의 질문에 NJ는 훨씬 더 일찍 초등학교 때였다고 대답한다. “그때부터 모든 일이 시작됐지. 하지만 그건 설명 못 해.” <하나 그리고 둘>에서 인간은 설명할 수 없는 순간의 매혹에 붙잡혀 나머지 전체의 삶을 망치는 존재다. 셰리와 재회한 뒤 도쿄에서 돌아온 NJ가 착잡하게 말하는 것처럼 두 번의 기회가 주어진다고 해도 아무것도 바뀌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이 경험은 초등학교 시청각실에 숨어 들어가 다큐멘터리를 보던 중에 같은 반 친구에게 사랑에 빠지는 양양의 체험으로 전이된다. 스크린에 비친 순간의 매혹은 아무것도 바꾸지 못하지만 모든 것을 바꿔놓는다. 영화는 설명되지 않는 의심스러운 감각으로 우리가 머무는 세계의 감각을 순식간에 조정한다.

영화의 21세기는 눈앞에 펼쳐진 세계의 치명적인 매혹과 불명확한 위상을 나란히 포착하며 탄생한다. <하나 그리고 둘>과 1년의 시차를 두고 완성된 허우샤오시엔의 <밀레니엄 맘보>는 독특한 회고의 목소리로 영화를 시작한다. “여자는 하오하오와 헤어졌다. 그러나 그는 늘 그녀를 쫓아다녔다. 여자에게 전화하고 돌아오도록 애원했다. 여자는 도망갈 수 없었다. 마치 최면에 걸린 것처럼 그녀는 항상 돌아왔다. 이 일은 10년 전인 2001년의 일이다. 세계는 21세기를 맞이했고 새로운 밀레니엄을 축하하고 있었다.” 목소리의 주인인 비키는 도입부의 화면 속에서 다리 위의 긴 터널을 통과하며 이따금 뒤를 돌아본다. 화면 위를 떠도는 비키의 목소리는 미래 시점에서 과거를 되돌아보며 자기 자신을 ‘그녀’로 부른다. 이제 막 스크린에 펼쳐지기 시작한 현재는 그토록 낯선 것이 되어 있다. 뒤엉키고 분해된 기억과 시간을 조직하며 에드워드 양 허우샤오시엔의 영화는 21세기 영화에 관한 한 가지 실마리를 전해준다. 영화는 이미 지나가 버린 과거의 장력에 얽매이면서 어쩔 수 없이 미래의 시간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는 행위다. 뒤를 돌아보면서도 멈추지 않고 앞으로 나아가는 비키의 매혹적인 몸짓은 21세기 영화의 좌표를 규정 짓는 알레고리적 신체가 된다. 영화는 분리된 비키의 발걸음과 목소리에 맞춰 아득한 과거와 이미 결정된 미래가 뒤얽히는 시간을 비춘다.

구로사와 기요시의 <밝은 미래>에서 끔찍한 살인을 저지른 아리타는 자살 직전에 자신의 몸을 철사로 감아 검지를 바깥으로 뻗는 손짓을 남긴다. 아리타는 동료인 니무라에게 그 손짓이 앞으로 ‘가라’는 신호라고 말해준 바 있다. 철사로 묶어 자살한 아리타의 신체는 역설적이게도 앞으로 나아가라는 능동적인 신호에 수동적으로 주박되어 있다. 이 뒤틀린 신체에 영화의 좌표가 깃들어 있다. 크리스티안 펫졸트의 영화에서 자전거에 탄 여자는 앞으로 나아가면서 자꾸만 뒤를 돌아본다. 페드로 코스타의 영화에서 방 안의 남자는 벽 앞에 서서 등 뒤에 있는 사람들과 대화를 나눈다. 정해진 시간에 열차가 도착하는 것처럼 영화는 시작하고 나면 뒤로 돌아갈 수 없이 끝에 다다라야 한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영화는 방향을 되돌려 뒤를 돌아봐야 하는 과업을 간직하고 있다. 구로사와 기요시는 영화란 화면 외부에 펼쳐진 폭력적인 세계와 접합해 있고 원리적으로 거기서 도망칠 수 없는 매체라고 말한다. 이어지는 그의 주장에 따르면 그러한 기반 뒤에 따라오는 영화의 21세기는 그 원죄를 알고 있으면서도 아무것도 하지 않았던 매체의 책임을 져야 하는 시기다. 우리는 영화의 시선으로 펼쳐진 세계의 매혹이 파열되고 있다는 것을 자각한다. 21세기 영화의 신체는 선명한 소명에 몰두하는 고전주의적 영웅들처럼 앞으로 나아가지 않는다. 여정의 목적과 도착지를 잃어버린 전후 영화의 신체처럼 무기력한 자세로 아무것도 보지 못하는 것도 아니다. <밀레니엄 맘보>의 도입부를 묘사하며 말했듯이 21세기 영화는 앞을 향해 나아가면서 주어진 자세를 비틀어 이따금 뒤를 돌아보는 영화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미래로 향하면서 과거에 발을 디디고 있다. 어제도 오늘도 아닌 시간 속에서 영화는 서로 다른 체계로부터 오는 정반대의 명령에 붙잡혀 있다.

세계에 철저히 몰입하는 동시에 주어진 세계의 의미와 좌표를 되짚기 위해 영화가 고안한 것은 스크린에 펼쳐진 영화적 공간 내부에 이미지를 촬영하고 재생하는 또 다른 형태의 스크린을 불러들이는 것이다. <하나 그리고 둘>과 <밀레니엄 맘보>는 영화관의 스크린과 컴퓨터 모니터, 텔레비전과 CCTV 화면, 카메라와 촬영된 이미지로 화면 내부를 빼곡히 채운 영화들이기도 하다. 21세기 영화 속 인물들은 서사가 진행되는 장소를 배회하면서 그 장소의 속성과 의미를 되짚고 갱신하는 다양한 스크린의 장소에 거주한다. 영화는 마치 이면화를 그리는 것처럼 현실의 장소와 이미지의 장소를 복잡한 세계의 단면으로 다루고 있다. 영화는 하나의 세계가 파열하는 것을 지켜보면서 수많은 이미지를 (재)생산하는 복수적 세계의 범람을 불러들인다. 그 복수형의 단면은 어느덧 너무 많은 사회적 조건이 동질화된 나머지 서사 내부에선 거의 불가능해진 세계 안의 차이와 부조화를 만들어내는 기제다. 이는 내부와 외부의 공간을, 과거와 미래의 시제를, 현존하는 질서와 잠재적인 질서의 경계를 확실하게 나눌 수 없는 편재적이고 비인격적이며 상호 교란적인 세계의 표상으로 나타난다.

코언 형제의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에서 돈가방을 든 도망자와 공기총을 든 추격자를 따라가는 보안관 벨은 언제나 뒤늦게 빈손으로 도착한다. 그는 추격자가 이미 다녀간 현장에 앉아 그가 지켜보던 텔레비전의 검은 화면을 바라본다. 텔레비전에 흐릿하게 반사된 형상을 보며 보안관은 그들과 내가 같은 것을 보고 있다고 중얼거린다. 웨스턴의 풍경을 전유하고 있지만 이곳은 도망자와 추격자와 보안관이 같은 자리에 앉아 텔레비전에 비친 흐릿한 형체와 시각을 공유하는 불안정한 형상들의 세계다. 이 세계의 풍경에는 기준을 설정할 만한 원점과 기원이 없다. 풍경이 주어져 있고, 그에 대항하며 형성되는 다면화된 얼굴과 형상이 채워진다. 구로사와 기요시의 <회로>에서 세계는 온라인 공간에 접속한 뒤 유령이 되어버리는 인간의 얼룩으로 채워지며 인간의 시선과 유령의 시선을 공유한다. 데이빗 크로넨버그의 <코스모폴리스>에서 세계는 리무진 창문 너머로 파노라마처럼 지나가는 현실의 단면과 디스플레이 모니터 위의 평면으로 분할되며 두 가지 스크린은 모두 역사와 기원이 없는 허구적 풍경처럼 제시된다. 샹탈 아커만의 <노 홈 무비>에서 카메라를 든 아커만은 스카이프 모니터 화면을 가득 채운 어머니의 얼굴을 담아낸다. 카메라는 모든 간극과 격차가 실종된 세계의 원리를 실시간으로 비추지만 스크린에는 추상적인 픽셀의 형태로 조각난 형상이 포착된다. 세계는 유령의 시각으로, 이동수단의 시각으로, 데이터와 디스플레이 장치의 시각으로 묘사된다. 그러니 장 뤽 고다르의 <필름 소셜리즘>에서 시작과 끝을 가늠할 수도, 누가 무엇을 위해 촬영했는지도 파악할 수 없는 저화질의 스마트폰, 비디오 푸티지, CCTV 영상은 허구적 세계의 위상이 파괴된 현실을 증언하면서 현실과 허구의 접점을 다시 회복하려는 절실한 영화의 자기파괴다.

<데자뷰>

스크린을 매개로 현실과 허구를 나란히 두고 그 관계를 탐색하는 자기파괴적 사태를 극단적으로 밀어붙인 사례가 토니 스콧의 <데자뷰>다. 이유 모를 선박 폭파사건으로 시작하는 이 영화에는 원격 위성 장치를 토대로 지나간 과거를 모든 각도와 시점에서 다시 관측할 수 있는 스크린이 있다. 이 스크린에는 정확히 4일 전의 시간이 재생되고 있으며 지켜보는 이들은 시간을 앞으로 당기거나 되돌릴 수 없다. <데자뷰>는 스크린을 매개로 4일 전의 과거와 현재가 나란히 공존하는 세계를 시각적으로 조직한다. 폭파사건을 조사하는 수사관 더그는 범인에게 살해당해 현재 시제에 존재하지 않는 여자를 스크린으로 지켜본다. 눈앞에 존재하지 않는 상대방이 눈앞에 있다는 감각이 더그의 시각을 물들이기 시작하고 이는 이해할 수 없는 매혹으로 번진다. 스크린 속의 여자는 아무렇지도 않게 존재한다. 하지만 과거에 이미 죽어버린 인간이 눈앞에 아무렇지도 않게 존재한다는 조건 속에서 대상을 바라보는 시각은 지극히 낯선 경험으로 뒤바뀐다.

스크린과 현실을 동시에 바라보는 이중적 시각에 충격을 가하는 사건은 영화 중반부에 벌어진다. 더그는 스크린의 범위를 벗어난 범인의 행적을 뒤쫓기 위해 4일 전의 과거가 영상으로 재생되는 고글을 쓰고 자동차에 탄다. 그는 한쪽 눈으로 과거의 장소를 주시하고, 다른 눈으로 현재 시점의 범인을 추격한다. 하나의 시각에는 과거를 따라가는 추적이, 다른 하나의 시각에는 현재 시점에 범인을 쫓는 추격이 교차하며 스크린에 두 가지 시제의 영상이 충돌한다. 파괴된 세계는 두 눈에 비치는 분열적 표상으로 순식간에 다가온다. 과거와 현재가 나뉘는 시각을 매개로 더그는 마침내 4일 전의 범인이 도착한 곳에 이른다. 하지만 현재 시점에 그곳은 불타버린 흔적으로만 남아 있다. 그가 지켜본 분열된 ‘현실’은 그가 발을 디디고 선 현실과 다르다.

영화는 하나의 거짓된 세계를 꾸며내는 기술이다. 하지만 영화 속에 또 다른 화면과 스크린이 틈입할 때마다 하나의 거짓말은 불가피하게 다른 하나의 거짓말과 만나게 된다. 영화는 내부에서 태어나는 서로 다른 유형의 스크린과 더불어 존재한다. 이 조건 아래서 영화가 꾸며낸 거짓의 세계는 언제든 다른 무언가로 변형되거나 일관된 원칙을 유지할 수 없을 만큼 중첩된 거짓말의 세계가 된다. 압바스 키아로스타미의 <사랑에 빠진 것처럼>은 이 불명확한 형상의 세계에서 끝없이 미끄러지는 거짓말의 이행 과정을 다룬다. 영화의 첫 시퀀스가 끝날 때 콜걸로 일하는 아키코는 술집 창문에 비친 투명한 형상으로 나타난다. 하지만 아키코는 영화가 장면을 바꾸고 이야기를 전환하는 분기점마다 다른 거짓말의 세계에 거주한다. 그녀는 택시 창문에 비친 중첩된 형상으로, 노교수의 침실 한쪽에 있는 텔레비전에 비친 희끄무레한 그림자로, 남자친구인 노리아키가 발견한 성매매 광고 사진의 이미지로 변신한다. 그녀는 끊임없이 표상이 머무는 장소를 옮기며 영화를 움직이게 한다. 아키코는 “~인 것처럼”이라는 가정법에 사로잡힐 때마다 영화가 꾸며낸 거짓의 세계에 적합한 형상으로 프레임 내부에 거주한다. 아키코가 임시적으로 거주하는 이미지의 평면은 영화적 허구와 가정법의 진실이 공존하는 픽션의 절단면이다. <사랑에 빠진 것처럼>은 서로 다른 거짓말의 집합으로 채워진 물리적 세계에서 공존 불가능한 거짓이 충돌할 때 세계는 순식간에 사라져버릴 수 있다는 불안에 사로잡혀 있다. 하지만 불안에도 불구하고 거짓말에 노출된 그들이 잠시 머물 수 있는 임시적인 장소를 끝없이 발명하는 영화다. 21세기의 영화는 서로 다른 화면과 서로 다른 거짓말이 품고 있는 불안을 안고, 그러나 멈추지 않는 발걸음으로 앞으로 나아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