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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보이는 것은 무엇인가? - 오늘날 영화비평의 어휘사전이 빈곤해진 이유

최근 <씨네21>엔 저널리즘 영화비평의 오늘날을 고심하게 하는 몇개의 글이 실렸다. 이 글은 이러한 흐름에 관한 (셀프) 리액션이다. 2주 동안 이어진 창간 기념호 특집 ‘잡지, 안녕하십니까’는 전 세계 영화잡지들의 고민을 전했다. 세계 최고(最高), 최고(最古)라 불리는 영화잡지들마저 너나 할 것 없이 비평 지면의 미약해진 힘을 담담하게 고백했다. 이 현상의 구체적 원인은 무엇일까. 단서들은 곳곳에서 자기주장을 펼치고 있다.

먼저 비평계의 트롤을 자처한 gkd는 “지금의 영화 문화는 보편성을 탐구한다는 차원에서 분명 퇴행적”이라며 작금의 영화비평이 사회에 질문을 던지지 않는다고 지적했다(<씨네21> 1546호). 한편 에이드리언 마틴은 정체성 정치를 중심으로 한 사회정치적 기준이 영화비평을 잡아먹고 있다고 토로했다(<씨네21> 1550호). 한쪽은 영화 문화와 사회의 교환 관계가 공허하다고 말하고, 한쪽은 그 교환 관계가 과잉이라 비판한다. 우연히 만난 두개의 글이 충돌하며 필연적 질문을 만든 것이다.

어느 쪽이 더 합당한 말인지 고민하려 들 무렵, 이들의 공통된 논리가 먼저 눈에 띈다. 언뜻 보면 다른 주장의 충돌 같지만, 영화와 사회의 관계가 황금률을 지키지 못하고 있다는 점에선 일맥상통한다. 여하간 영화비평의 힘이 (그들의 소망보다) 약소하다는 것이다. 왜일까. 이에 대한 배경으로 미디어 환경의 변화라든지, 영화 매체의 위상 저하라든지, 읽는 문화의 전반적 침체라든지 하는 거시적 배경부터 끌고 오는 것은 다소 무용하다. 너무 손쉽고 안일한 답이다. 해결할 수도 없는 문제다. 에이드리언 마틴처럼 슈퍼볼 하프타임 쇼를 현대적 미장센의 사례로 언급하며 영화비평의 범주를 넓힐 수는 있겠으나, 지금 느껴지는 위기의식은 다른 맥락에 있다. 영역의 확장 이전에, 현재의 영화비평이 느끼고 있는 한계의 근본적 이유를 짚고 감이 이치에 맞을 것이다.

상투어의 원천

<태극기 휘날리며>

결론부터 말하자면 오늘날 영화비평의 중대한 결핍은 비평이 쓰는 어휘사전의 빈곤함에서 오고 있다. 일련의 예시를 떠올려보자. gkd의 논평처럼 하스미 시게히코의 영향 아래 ‘숏’, ‘움직임’, ‘제스처’, ‘감각’, ‘충동’ 같은 단어의 쓰임이 근래 부쩍 늘었음을 부정할 순 없다. 에이드리언 마틴의 의견에서도 마찬가지의 맥락이 발견된다. 정체성 정치를 비롯한 근래의 사회 담론에서 흔히 쓰이는 단어들이 영화비평의 논리를 지배한다는 것이다. 예컨대 ‘주체화’, ‘다양성’, ‘당사자성’, ‘자기파괴’, ‘경계’ 같은 것들이 있겠다. 과거 정신분석학이나 미디어 이론의 유행도 비슷한 상황을 낳았었다. 영화 분야만의 현상도 아닌 듯하다. 최근 온라인상에선 미술관에서 자주 보는 단어들에 진부함과 지루함을 느낀다는 이야기가 오고 간 적 있다. 통과하기, 전복하기, 상상하기, 해체하기와 같은 말들이 전시 도록에 피상적으로 반복되는 것 같다는 이야기였다.

위 어휘들의 면면을 폄하하는 것이 아니다. 새로운 수사를 쓰고 문체를 바꿔보자는 일차원적 주장도 아니다. 비슷한 표현을 꺼낼 수밖에 없도록 하는 비평적 어휘의 유통 구조를 살피자는 이야기다. 언급한 단어들의 가치를 판단하기 이전에 무엇이 쓰이는지의 문제보단 왜 계속 쓰이는지의 이유를 고심하려는 쪽이다. 용례를 하나하나 트집 잡거나 단순히 당대 유행어의 무비판적 수용과 재생산이라 비아냥거리는 일은 퇴행적 작업일 뿐이다. 텅 빈 비판보단 현상의 근원과 개선의 여지를 찾아보고 싶다. 우선, 이 지긋지긋한 상투어들은 대체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돌이켜보면, 영화비평에 쓰이고 있는 상투어란 대개 작품의 바깥에서 온 개념이다. 즉 프레임 바깥, 사회의 단어다. 움직임, 제스처, 감각, 당사자성, 주체성, 경계는 영화에 적용할 순 있어도 영화가 스스로 드러낸 것들이 아니다. 사회에서 통용하는 (추상적) 개념이나 합의들이 영화의 물리적인 근간인 것처럼 쓰이는 것이다. ‘숏’이라는 단어마저도 마찬가지다. 통상 물리적인 기준에서 하나의 컷과 숏을 규정하고는 있으나, 실제 숏은 온갖 벡터와 이미지 등 개념화 이전에 흘러가버리는 요소로 구성된다. 숏이라는 단어가 상투적으로 느껴지는 것은 숏의 실제가 아닌 개념만을 게으르게 활용하고 있기 때문일 공산이 크다. 즉 비평 어휘의 빈곤함은 영화 바깥에 주어진 현실을 너무나 쉽게 개념화하여 사용한다는 실책에 있다. 이 순간 비평은 발견의 가능성을 버리고 기존의 사회적 개념을 재확인하는 수단에 지나지 않게 된다. 비평의 갈증을 느낀 이들은 급한 마음에 바닷물을 마시듯 영화 바깥의 것들을 포섭하려 했던 셈이다.

그렇다면 비평이 영화 내부에서만 작동해야 한다는 것일까. 혹은 영화의 내부를 글로 옮기는 일에만 집중해야 한다는 것일까. 꼬리를 무는 질문에는 필연적으로 언어의 인용 불가능성이 맞닿는다. ‘개념화되기 이전에 흘러간 것들을 어떻게 언어로 바꾸고 비평한다는 것인가?’란 본질적인 한계에 부딪히는 것이다. 이에 관해 수년 전 <마테리알>1호의 “‘<씨네21>식 비평’ 비판”에서 함연선 평론가는 <씨네21>를 비롯한 동시대 영화비평의 경향을 지적한 바 있다. 이미지와 사운드를 문자로 옮기는 것이 불가능함에도 “움직이는 이미지를 묘사하겠다는 집념을 가진 종류의 비평은 더욱 무력해질 뿐”이며 “장면이나 인물을 묘사하는 것이든, 중요한 것은 이것들이 모두 서사와 관련이 있다”라고 설명한 것이다. 모두가 느끼는 영화비평의 본질적 제약을 다룬 모범적 레퍼런스이지만, 그 한계 이후의 대안까지 다루지는 않았다.

그 이후가 성립되기 어려웠던 이유는 ‘장면을 묘사’한다는 행위를 하나의 것으로 여겼기 때문으로 보인다. 장면을 묘사한다는 일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하나는 장면 속의 요소를 사회적 코드로 읽어 스토리텔링의 재료로 쓰는 것이다. 비평이 영화의 서사에만 매몰된다고 할 때 흔히 제시되는 문제다. 또 하나는 장면 속의 요소를 그대로 기술하는 것이다. 달리 말해 보이는 것을 쓰는 것이다. 영화비평의 가능성은 분명히 후자에 있다고 생각한다. 언어로 영화를 붙잡고자 한다면 어떻게든 영화 안쪽의 흐름을 기술해야 한다. 대안은 ‘왜 못 쓰는가’보다 그럼에도 ‘어떻게 쓸 것인가’에서 찾아야 유효할 것이다.

이 태도는 어쩔 수 없이, 스크린의 표면만을 탐닉해야 한다는 하스미 시게히코의 기치를 떠올리게 만든다. 하스미 시게히코는 “영화담론에서 오디오비주얼(audiovisual)이라는 개념을 추방해야 한다”( 1호)라고 말한 바 있다. 오디오와 비주얼 즉, 소리와 영상을 철저히 분리하여 다뤄야 한다는 주장인데, 이는 영화의 청각성과 시각성을 ‘서사화’의 기준으로 나눈 것으로도 풀이된다. 애초 스토리텔링(storytelling)이란 ‘허구가 아닌 사건(역사)을 말하고 들려준다’라는 구술적 어원에서 탄생했다. 서사화된 사건의 유포가 청각의 차원에 있다면, 기록되지 않은 현실과 허구의 공유는 시각의 차원에 있는 것이다. 즉 영화의 인용 불가능성을 (최대한) 극복하고 서사적 요소에 매몰되지 않은 비평은 시각의 영역에서 가능하다. 장면을 묘사할 수밖에 없다는 뜻이다. 들리는 것은 이미 정립된 과거적 개념이고, 보이는 것은 새로 쓰일 수 있는 미래형의 장소다. 근래 영화비평이 하스미 시게히코의 영향권을 맴돌았던 이유는, 이러한 대안의 방향성을 모두가 무의식적으로 감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라 생각된다.

보이는 것으로부터의 비평

<왕과 사는 남자>

서사화와 개념화는 비슷하다. 일련의 사물이나 현상에 의미를 부여하고 체계화하는 행위다. 그러니 영화 바깥의 개념들을 비평에 가져오며 여러 상투어를 반복하는 것은, 이미 정리된 이야기로 영화를 가리는 것과 같다. 자연스레 영화와 영화비평은 현실을 이길 수 없게 된다. 약해질 수밖에 없다. 단순하게 생각해보자. 왜 동시대의 저널리즘 비평은 국민의 3분의 1이 감상한 <왕과 사는 남자> 앞에서 그저 무력할 수밖에 없을까. 영화의 완성도를 피상적으로만 지적하면서 말이다. 먼저 <왕과 사는 남자>의 서사가 너무나 정직하고 성실하기 때문일 것이다. <왕과 사는 남자>가 들려주는 소시민적 아름다움에 불만을 느끼는 경우는 드물다. 이토록 착하기만 한 이야기에 양심상 어떤 딴지를 걸 수 있을까. 다만 보이는 것에 기준을 둔다면 다르다. <왕과 사는 남자>가 보여주는 장면들의 연속, 즉 시지각적 요소와 ‘눈에 보이는’ 플롯의 구성은 분명히 진부하기 때문이다. 만약 <왕과 사는 남자>를 비평하고자 한다면 우리는 어쩔 수 없이 영화의 안쪽을 다뤄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한국의 지도자 콤플렉스라든가 하는 사회적 담론에 슬그머니 비평의 자리를 뺏길 뿐이다. 이것은 자리싸움이다. 사실은 싸움이라 하기에도 머쓱한 생존의 방식이다. 예전, 예를 들어 <바보들의 행진>(1975) 같은 작품은 지금 시대에 만들어지거나 비평되기 어려운 영화다. 독재 정권의 아픔을 영화 속에 슬며시 집어넣고 열정적으로 해독해야 했던 과거와 달리, 지금은 영화 말고도 아주 직관적으로 사회적 담론을 성토할 장이 넘쳐난다. 여기서 영화비평이 자리를 보전하기 위해선 그것만이 할 수 있는 일에 몰두해야 한다는 뜻이다.

<시라트>

다른 예시도 들어보자. 최근 개봉하여 인기를 끈 일련의 아트하우스 영화들, <시라트>나 <센티멘탈 밸류>의 이야기를 거부하는 이는 거의 없을 것이다. 전쟁과 폭력의 기운이 언제고 터질지 모르는 황무지에서 불안해하는 개체들의 심리, 이토록 큰 시대의 생채기 속에서도 예술을 통해 끝내 관계와 삶을 회복하는 사람들의 이야기에 불만을 제기하기는 어렵다. 그러니 영화를 바깥으로부터의 이야기로 간주하여 사유를 끝낸다면 비평의 할 일은 여기서 종료될 뿐이다. 세부적인 방식은 차치하더라도, 비평의 생존을 위해서라면 결국 영화가 보여주는 것들에 기반하여 쓸 수밖에 없다. 그곳에서 이야깃거리를 찾아야 한다. 아마 두 영화에 불만을 가진 이들은 이미 안쪽부터의 비판점을 느끼고 있을 듯하다. 그다음 단계는 들리는 것과 보이는 것을 명확히 분리하고, 그중에 무엇을 비평하는지 자각하고 표명하는 것이다.

gkd의 말처럼 영화(비평)가 사회에 질문을 던져야 한다면, 그것은 사회의 개념을 편의적으로 차용하는 방식이어선 안된다. 오래된 나무의자, 갑작스러운 눈발, 무심코 떨어지는 표지판, 선물받은 모자. 보기 전엔 의미를 쓸 수 없는 영화만의 상세를 바깥으로 끌어내야 한다. 그가 가장 인상적인 한국 영화비평의 예시로 들었던 허문영 영화평론가의 “한국영화의 ‘소년성’에 대한 단상” 역시 다음의 장면 묘사로부터 시작했음을 잊어선 안된다. “<태극기 휘날리며>에서 가장 의아스런 장면은 이 영화의 결말이다. 노인이 된 오늘의 진석이 형의 유골 앞에서 오열하는 장면으로 끝날 듯하다가, 곧이어 한국전쟁 직후에 집으로 돌아온 청년 진석이 그의 가족들과 만나는 장면이 등장한다. 카메라는 공중으로 솟아오르며 (…) 동기야 무엇이건 이 인상적인 결말은 <태극기 휘날리며>라는 영화 전체를 하나의 이미지로 수렴한다. 그것은 홀로 남겨진 소년이라는 이미지다.”

‘사이비 현실’이 되지 않기 위해

<센티멘탈 밸류>

비평이 영화의 표면이라든지 이미지라든지 보이는 것에 몰두해야 한다는 이야기 역시 사실은 무척 진부하다. 궁핍한 표현이기 그지없다. 구태의연하게 반복하려니 멋쩍다. 하지만 앞길이 막막할 때일수록 필요한 것은 정공법이지 않을까. “영화가 할 만한 일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나는 프레임 외부에 아무것도 없다는 것, 그래서 프레임 내부만이 자신에게 있어 유일한 현실이라는 것을 믿어 의심치 말라고 권하고 싶다. 한국영화가 동시대의 문제를 제대로 언급할 수 있기 위해서 다른 길이 있다고 나는 생각하지 않는다”(<필름 컬처> 2호)라는 임재철 영화평론가의 28년 전 전언을 이쯤에서 상기해본다.

또는 그가 1999년 “영화 문화의 ‘불관용’에 대하여”(<필름 컬처> 4호)에서 썼던 바를 그대로 붙여 넣어도 작금의 상황을 진단하기에 큰 무리가 없겠다. “영화 관람이 스크린보다는 작은 화면을 통해 더 많이 이루어지는 지금 (…) 영화에 대한 고전적인 관념이 점점 퇴색되고 있는 것은 세계적인 현상이다. (…) 새로운 문화 산업의 현실을 인정하되 그것을 뛰어넘으려는 노력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만이 ‘사이비 현실’을 넘어서서 구체적인 삶의 감각으로까지 나아갈 수 있도록 해줄 것이다.” 여기서 ‘사이비 현실’이란 영화가 사회의 일부이거나 축소인 것처럼 여기는 현재의 사태와 유사하게 읽힌다. 그러나 영화는 그저 영화다. 우리가 겪는 것과는 또 다르게 펼쳐진 현실이다.

역사가 반복된다는 식의 상투적 어구를 꺼내려는 것은 아니다. 겨우 한 세대 사이에 특정 매체를 둘러싼 역사가 반복되었다기보다, 영화와 영화비평의 궤는 그저 꽤 긴 시간 동안 내리막을 걷고 있는 상태에 가까울 테다. 그렇다고 하여 괜히 다른 힘에 야합하고 사회 담론의 자그마한 수단이 되기는 영 열없다. 대신 영화 안쪽을 보며 더욱더 부단히 몸부림치는 쪽이 합리적으로 보인다. 조금이나마 더디게 내리막을 구를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