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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평] 괴물 옆에서: 동시대 미국 여성영화의 어떤 기류, 김소희 평론가의 <브라이드!> <다이 마이 러브> <폭풍의 언덕> <햄넷>

<폭풍의 언덕>

그들은 왜 과거로 갔을까. 에머럴드 피넬은 에밀리 브론테의 고전소설 <폭풍의 언덕>의 배경인 19세기로 향했고, 클로이 자오는 <햄넷>에서 셰익스피어의 실제 삶에 바탕을 둔 픽션에 기대 17세기 전후를 그린다. 매기 질런홀의 <브라이드!>는 메리 셸리가 19세기 초에 집필한 고딕소설 <프랑켄슈타인>에 기반을 둔 픽션 1930년대를 배경으로 펼치며, 린 램지의 <다이 마이 러브>는 특정 시대를 명명하진 않지만 4:3의 화면비와 필름의 질감, 초원의 이미지 등 필름 영화 시기의 공기를 구현한다. 몇몇은 원작에서 비롯된 설정이니 시대적 배경의 세세한 당위를 따질 일은 아니다. 이들 영화는 시대를 정밀하게 묘사하려는 욕망이 없다. 다만 무언가를 발굴하기 위해 다른 시간대를 활용한다. 요약하자면 과거는 여성 신체에 대한 제약과 구속을 강화하는 배경이지만, 에너지가 돌출하는 무대이기도 하다.

네편의 영화 속 주인공은 모두 결혼 혹은 출산이라는, 여성의 유구한 활동에 묶인 존재다. 말하자면 영화 속 여자들은 한쌍을 구성하는 일부분이다. 그런데 한쌍의 다른 면은 저마다의 이유로 온전치 못한 상태다. <폭풍의 언덕>에서 캐시(마고 로비)는 남매처럼 자라온 히스클리프(제이컵 엘로디)와 사랑에 빠지지만, 오해 속에 다른 남자와 혼인한다. 뒤늦게 서로의 마음을 확인한 두 사람은 위험한 사랑을 지속한다. <햄넷>에서 아녜스(제시 버클리)는 극작가인 남편 윌리엄(폴 메스칼)이 공연 준비로 집을 비우는 동안 남편 없이 아이를 낳아 기른다. <브라이드!>의 페넬로피(제시 버클리)는 특수한 존재인 프랑켄슈타인(크리스천 베일)의 육체적 외로움을 덜어주기 위한 목적으로 만들어진, 재생된 하나의 몸이다. <다이 마이 러브>의 그레이스(제니퍼 로런스)는 사랑에 빠져 혼인하고 출산했으나, 점차 집필은 물론 거의 모든 활동에 의욕을 잃는다. 남편 잭슨(로버트 패틴슨)은 그를 보듬기는커녕 신경을 자극하기 일쑤다.

시간의 괴물성과 죽음

<브라이드!>

여성영화가 생물학적이거나 본원적인 성을 공고화하는 재현 방식을 이탈하며 진화해왔음을 염두에 둔다면, 여기에서 다루는 네편의 영화는 이러한 흐름을 역행하는 시대착오적 작업에 가까워 보인다. 이들 영화가 전작에 비해 반향을 얻지 못한 이유는 이들의 회귀가 동시대 관객의 욕망과 적절히 부합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들이 다소 맥 빠지는 결과물이라는 것은 인정한다. 이 영화들은 동시대의 첨예한 문제를 다뤘던 감독의 전작에 미치지 못한다. 홈리스 문제를 다룬 클로이 자오의 <노매드랜드>, 성폭력을 다룬 에머럴드 피넬의 <프라미싱 영 우먼>, 모성의 미스터리를 다룬 매기 질런홀의 <로스트 도터>, 총기 난사 사건 가해자의 어머니를 그린 린 램지의 <케빈에 대하여>등 강렬한 동시대의 문제에 관해 발언하는 영화를 발표한 바 있다. 불만을 잠시 접어두고 이 영화들이 과거에서 무엇을 양분으로 삼으려 하는지 되짚어보자. 네편의 영화에 감도는 비밀스러운 공통어는 괴물성이다. 영화사적으로 주목받는 여성 캐릭터는 대부분 괴물성을 지녀왔다. 반면 이들 영화의 괴물성은 잠재되어 있다. 이들은 괴물로서의 여성을 재현하는 대신, 괴물 옆의 여성을 그린다. 마치 ‘원한다면 괴물이 될 수는 있다. 하지만 그러지 않겠다’라고 선언하는 것 같다.

여성의 괴물화에는 두 가지 측면이 있다. 하나는 주로 남성 캐릭터의 입장과 시선에서 묘사된 괴물화다. 여기에서 괴물성은 불신의 존재를 의미하며 ‘팜므파탈’로 요약된다. 시간이 지나면서 여성의 괴물화는 단지 남성의 무의식적인 두려움의 발현이라는 현실적인 차원을 넘어, 여성 괴물의 실제성에 표현주의적으로 탐닉하는 방식으로 드러났다. 여성 괴물화의 두 번째 측면으로, 남성 캐릭터에 의해 묘사된 괴물성을 바꿔치기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여성 캐릭터의 괴물성은 그 자체로 장르적이며 파괴적인 쾌감을 준다. 신체의 부분들이 제멋대로 기워진 기괴한 형상의 여성 몬스터를 탄생시킨 <서브스턴스>와 벌크업한 근육질의 거대 육체로 각인된 <러브 라이즈 블리딩>은 배우의 몸과 특수효과가 혼합된 왜곡된 이미지를 활용한다. 이들은 괴물-주체화의 욕망을 드러내며, 그것이 여전히 효과적이라는 사실을 증명한다.

반면 여기에서 다루는 영화는 괴물 되기보다 괴물 옆에 서기를 보여준다. 괴물 옆에 선 존재는 곧 괴물을 향한 질문이 된다. 괴물은 누구인가. <브라이드!>의 프랑켄슈타인이라는 이름마저 흡수한, 그러나 어느덧 생물학적인 문제를 겪는 존재다. 파괴적이지만, 동정을 불러일으킨다. <폭풍의 언덕>의 뒤틀린 욕망으로 주변 사람들을 파괴하는 괴물, 히스클리프다. 그로부터 저항하려 할수록 휩쓸리고 만다. <다이 마이 러브>에서 괴물은 정상성의 범주에 버티고 선 무심한 남편의 모습을 한다. 누구라도 자신의 조각을 발견하게 될 현실적인 거울이다. <햄넷>에서 그는 예술가의 모습으로 등장한다. 그는 예술을 통해 슬픔을 공유하고 해소한다. 괴물이 당대의 두려움과 욕망을 반영하는 대상이라면, 괴물 옆에 선 이들 역시 어느 정도는 괴물이다. <브라이드!>에서 프랑켄슈타인과 나란히 선 브라이드는 괴물의 에너지를 능가하고 초월하며, <햄넷>에서 자연과 소통하는 아녜스의 능력은 종종 마녀의 주술에 가까운 것으로 인식된다. 영화는 그의 능력을 과장하는 대신 신비로움을 보존한다. <다이 마이 러브>에서 그레이스는 타인의 이해를 구하지 않는다. 자기파괴적이고 예측 불가능한 행동으로 시선을 독식하는 그는 무기력과 파괴력 사이 동물적 욕망에 들끓는다. <폭풍의 언덕>은 상대의 괴물성마저 사랑하는 자의 괴물성을 보여준다. 그의 욕망은 죽음으로 완성된다.

과거로 돌아간 영화들이 드러내는 건, 시간의 괴물성이다. 시간의 괴물성은 죽음으로 치환된다. 죽음은 시간의 괴물성을 자각하게 하는 사건이다. 네편의 영화에서 죽음은 단순한 소재가 아닌, 서사 전반에 깔린 전제 조건이다. 영화 속 여성들은 죽음의 옆에서, 그와 상반되는 에너지를 동반케 하는 존재다. <다이 마이 러브>에서 잭슨과 그레이스가 입주한 집은 잭슨의 삼촌이 스스로 생을 마감한 장소다. 죽음의 기운이 그에게 옮겨온 듯, 그레이스는 무기력하면서도 돌출된 행동을 보인다. 그의 무기력은 섹스에의 충동과 몸싸움을 포함한, 어딘가 제의적인 동물의 몸짓을 오간다. <햄넷>에서는 존재 자체가 제의인 인물을 보여준다. 온몸으로 출산의 고통과 아들을 잃은 비극을 표현하는 제시 버클리의 연기는 그 자체로 제의적 의식이다. 아녜스는 연극이라는 형식 이전에 이미 완전한 연극인, 원형으로서 여성의 몸을 암시한다. 연극 <햄릿>에서 햄릿이 꾸미는 극중극은 삼촌과 어머니의 죄를 폭로하는 내용으로, 극에서 그들 자신을 마주하도록 의도된 것이다. 그와 비슷하게 극장에서 초연되는 연극 ‘햄릿’ 역시 어머니 아녜스를 위해 마련된 것처럼 보인다. 아녜스가 마주하는 대상은 연극이 된 자신의 사연만이 아니라, 연극이라는 형식과 그 안에서 양식화된 자신의 모습이다. <폭풍의 언덕>에서 캐시는 절제할 수 없는 욕망을 버티다 죽음에 이른다. 캐시의 죽음으로 끝맺는 결말은 감독의 결기가 드러나는 대목이다. 그의 죽음은 특정 개인이나 집단의 자각을 위한 수단일 수 없다. 첫 장면이 드러내듯 죽음은 이성이 아닌 본성을 작동시키는 매개다. 오프닝 시퀀스는 욕망과 죽음의 기묘한 연결성을 묘사한다. 공개 처형이 이뤄지는 광장은 어른과 아이를 가리지 않는 마을 사람들의 축제다. 몰려든 사람들의 표정은 기대와 흥분으로 가득하며, 마침내 사형수가 죽음에 이르면 사람들의 환호가 터져나온다. 공개 처형장은 영화가 없는 시대에 사람들의 구경거리이자, 영화의 기원이다. 가장 극적이라 할 이 다큐멘터리는 몰려든 구경꾼들과 그들의 흥분된 반응으로 인해 전혀 다른 영화로 전환되며, 비로소 완성된다.

<브라이드!>

<브라이드!>에서 페넬로피는 이미 죽었고, 다시 죽으며, 끝내 죽음에서 부활한다. 그는 곧 영화다. 아무렇게나 버려지고 묻힌 영화를 발굴하듯, 흙에서 건져낸 페넬로피의 몸은 전기에 의해 작동된다. 그의 몸에는 기름처럼 미끈한 검은 피가 흐른다. 그는 영화의 화신이다. 그와 동시에 관객이다. 페넬로피와 프랑켄슈타인은 영화관에 숨어든다. 프랑켄슈타인은 영화 애호가다. 스크린 앞의 프랑켄슈타인은 진짜 괴물은 그가 바라보는 영화라고 말하는 것 같다. 영화산업은 늘 누군가의 이름으로 지탱되며 굴러간다. 이름을 얻는다는 건 한편으로는 괴물이 될 위험성이 높아짐을 의미한다. 영화의 제목이 드러내듯 제시 버클리가 연기한 페넬로피는 본래 이름을 찾는 대신 ‘브라이드’라는 정체성을 고수한다. 프랑켄슈타인에 대응하는 하나의 주체가 되기를 거절하고, 끝까지 익명성으로, 여성으로 남겠다는 의미다. 여성들이 무너뜨린 최종 괴물에게 이런저런 고유명사를 덧붙일 수 있지만, 그것은 그 자체로 다시금 괴물-주체를 세우는 일이며, 이는 영화의 요구와 가장 멀어지는 길이다.

괴물 옆에 서는 것은 관객이 되는 것이다. <햄넷>의 마지막 장소인 연극이 상연되는 극장은 작품과 관객이 직접 소통했던 시기를 표시한다. 원형무대를 빽빽하게 에워싼 스탠딩석의 관객은 리액션을 통해 연극에 참여해 결말을 바꾸고, 작품을 고양한다. 작품은 결국 관객에 의해 완성된다는 사실을, 비극에서 파생된 멜로드라마를 경유해 보여준다. 관객성은 작가성의 반대편에 놓인 것이 아니라 작가성을 포함한다. 관객은 그 스스로 작가이면서 참여자이기도 하고, 바깥에 있으면서도 중심을 구성하는 복합적인 존재다. <다이 마이 러브>의 그레이스는 글쓰기를 멈춘 상태처럼 보이지만, 실은 끊임없이 글을 쓴다. 그의 도구는 자신의 몸이다. 여성은 모유로 글을 쓴다고 엘렌 식수

는 말했다.(<메두사의 웃음>) 어두운 가운데 홀로 깨어난 그레이스는 빈 종이에 잉크를 몇 방울 떨어뜨린 뒤 그 위에 모유를 떨어뜨린다. 점점이 떨어진 잉크와 모유가 뒤섞여 무정형의 모양을 이룬다. 이 장면은 잭슨과 그레이스가 바라보는, 별이 뜬 밤하늘의 우주 이미지로 연결된다. 진부한가? 그래도 그것이 현재 그가 생산할 수 있는 최상의 글이며, 그 글은 그녀 자신이다. 여기 네편의 영화를 엮어보는 까닭은 이 진부한 은유를 모방하고 싶은 충동인지 모른다.

기원을 돌아보는 까닭은

<다이 마이 러브>

느슨한 공통점을 지닌 네편의 영화는 모종의 연결성을 지닌다. <폭풍의 언덕>에서 히스클리프를 연기한 배우 제이컵 엘로디는 기예르모 델 토로의 <프랑켄슈타인>에서 괴물을 연기한 바 있다. <폭풍의 언덕>에서의 그가 < 프랑켄슈타인>의 그보다 한층 괴물스러워 보인다. 캐시와 히스클리프의 관계는 <프랑켄슈 타인>의 작가와 괴물의 관계에 비견된다. 괴물이 작가가 지닌 모든 추한 욕망을 외주화한 존재라면, 캐시는 명백한 괴물인 히스클리프의 옆에 버티고 서서 때때로 그 괴물성을 입기도 하고 밀치기도 하면서 곁에 존재하는 연루자다. <다이 마이 러브>에서 일상을 버거워하는 부부로 등장한 제니퍼 로런스와 로버트 패틴슨은 과거 초능력자를 연기한 바 있다. 로버트 패틴슨은 <트와일라잇> 시리즈에서 치명적인 뱀파이어였고, 제니퍼 로런스는 <엑스맨> 시리즈의 슈퍼히어로였다. 이들은 너무도 현실적인 공간에 도착했고, 여기에 적응하지 못함은 당연하다. 그레이스는 관계의 상투성을 버티지 못하고 튕겨나온다. 그 모든 일상의 우울을 끌어안은 채 불길 속으로 담담히 걸어 들어간다. 제시 버클리는 <브라이드!>에서 프랑켄슈타인의 신부이며, <햄넷>에서는 셰익스피어의 아내다. <햄넷>에서 그는 연극과 연극 이전의 것을 연결하는 주선자였다면, <브라이드!>에서도 주술적인 예언자로서의 작가와 그 실행자인 캐릭터를 동시에 연기하며 분리된 존재를 연결한다.

영화의 죽음이 더는 은유나 비유가 아니게 된 시대에 부쳐, 이들 영화는 각자의 방식으로 관객이 되는 연습을 한다. 괴물이 되고 죽음이 되고 과거가 되는 힘에 맞서, 자기 자신이 되고 끝없이 재생하며 현재가 되기 위해 기원을 돌아본다. 끝에서 다른 끝을 희구하는 본능을 재생하기 위해, 괴물 옆에서 끝내 존재하기 위해 발굴한, 관객이라는 역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