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슷한 영화를 길지 않은 시기에 자주 접한다. 2024년 <노 베어스>, 2025년 <신성한 나무의 씨앗>과 <그저 사고였을 뿐>에 이어 이번 <두 검사>까지. 인권을 중시하고 예술은 응당 핍박받는 쪽에 서서 헌신해야 한다는 기치를 내세운 여러 유명 영화제가 특별히 주목한 일도 닮았다. 물론 앞선 세 작품은 이란의 엄혹한 상황을 그리고 <두 검사>는 스탈린의 대숙청 공포 기간을 다뤄 배경이 다르다. 하지만 억압적 구조 아래 고통을 겪는 존재의 구도는 같다. 표면적으로는 현실을 고발하고 반성을 유도해 각성을 노린다는 점에서 일종의 장르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다만 <두 검사> 마지막, 검사 코르녜프(알렉산드르 쿠즈네초프)가 자신의 패착을 깨닫고 절망스러운 눈빛을 비추며 얇게 고개를 떨구는 모습을 보고선 더 말해야 할 게 있다고 느낀다.
젊음은 정의에 쉬이 현혹되는가
영화 말미 시스템 설계자로 위장한 비밀경찰국 요원은 갑자기 태도를 달리해 검사 코르녜프에게 짓궂은 말을 건넨다. 브랸스크 여자는 예쁘냐. 그런 사람도 있다고 코르녜프는 답한다. 그러자 요원은 여성을 비하하는 말과 함께 그가 동정인지 묻는다. 당황한 코르녜프는 왜 그런 걸 묻느냐는 듯 의아한 표정을 짓는다. 비슷한 질문은 모스크바행 기차 안에서 떠버리 노인도 했다. 앞서 교도소장이 검사로 임명된 지 얼마나 됐냐고 물었던 터다. 이 질문은 심지어 그가 경외하는 반체제인사 스테프냐크(알렉산드르 필리펜코)도 한다. 동정 추정과 신참 신분으로 가리키는 코르녜프의 젊음은 영화에서 에둘러 도드라지는 뾰족함이다. 처음 당도한 교도소 앞 코르녜프가 맞닥뜨리는 한 무리의 여성의 얼굴은 자글자글한 주름으로 가득하다. 교도소에서 접견할, 일찍이 흠모하고 우러르던 고위 법조인이자 반역자 스테프냐크가 그렇고, 교도관, 교도소장, 검찰총장, 모스크바행 기차 속 떠버리 노인까지 그가 극이 나아가는 길목에서 마주하는 주요 인물은 모두 그보다 나이가 많다. 더러 또래 성인과 아이가 등장하지만 강조되지는 않는다.
코르녜프의 젊음을 그가 스테프냐크와 만나도록 이끈 원동력으로 쓴 점이 중요하다. 젊음은 정의에 쉬이 현혹되는가. 지금은 꼭 그렇다고 하기 어렵지만 정의는 젊음에 더 어울린다고 보는 고정관념은 아직 있다. 이미 스탈린의 파시스트들이 장악한 소련의 상황에서 누구라도 쉽게 코르녜프같이 행동할 마음을 먹기 힘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코르녜프의 젊음은 다르다. 그는 학생 시절 법대 행사에서 소련 법치의 현인 스테프냐크를 경유해 볼셰비키의 진리를 본 터다. 코르녜프로서는 그가 감옥에 간 건 말이 안되는 일이다. 분명히 무언가 있다. 그를 만나러 가야 한다. 그러나 그의 젊음은 경직되고 불안하다. 용건을 묻는 교도소 부소장 앞에서 긴장해 한참이나 수첩을 뒤적이고 검찰총장 비서실 공간의 벨 소리에도 깜짝 놀라는 그다. 그렇다면 이 불안은 그의 실패나 고초를 예정하는가. 긴장하고 두려움에 휩싸인 채 홀로 부소장실에서 서성이는 그를 보자면 언제든 뒤로 물러설 것만 같다. 그러나 그의 젊음은 스테프냐크의 말에 다시 정의의 신념에 불붙인다. “자네가 용기 있는 진짜 볼셰비키이자 정직한 소련 법조인이라면 스탈린에게 가라.” 한때 코르녜프와 같았을 스테프냐크가 건넨 암시이자 지령이다.
젊음은 결함이 아니다
스테프냐크에게 북돋움을 받은 그의 이후 행보는 의문이다. 스테프냐크는 분명 스탈린에게 가라고 말했다. 그렇지 않으면 정치국의 예조프, 보로실로프, 몰로토프를 만나라고도 했다. 한데 그는 검찰총장 비신스키(아나톨리 벨리)를 찾아간다. 다른 장면도 있다. 모스크바행 기차에서 그는 팔다리가 없는 노동자이며 과거 레닌과 마주했다고 주장하는 노인의 말에 귀 기울이지 않는다. 그의 경험은 귀감이 될지 모르는데도 그렇다. 노인에 따르면 모종의 부탁을 하러 갔던 자신을 보고서 레닌은 팔다리가 없어도 노동자는 늘 환영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자기는 강제로 빈민 구호소에 격리됐음에도 국가의 보호를 받았다는 우스꽝스러운 해석을 덧붙인다. 스탈린 시절이 처참했다고 해서 레닌의 시대가 온전했을 리 만무하다. 스탈린은 레닌과 다를 것이냐 묻는 노인의 거듭된 물음 앞에서 코르녜프는 회피하듯 잠에 빠져 있다. 카메라가 잡은 코르녜프의 잠든 얼굴은 조금 더 길게 지속한다. 노동자의 말을 귀에 담지 않은 것, 또 스테프냐크의 말대로 하지 않고 자기와 친화적일 거라 여긴 탓인지 검찰총장을 찾아간 건 어쩌면 신념과 달리 무의식에 내재한 엘리트 의식의 발로라고 하면 지나칠까. 그는 권력의 언어 앞에선 긴장하나 민중의 언어를 두고는 부지불식간에 경계를 푼다. 실제 대숙청 시기 반동분자를 향해 자주 “미친개를 쏴라!”라고 외쳤던 검찰총장 비신스키 덕에 편히 브랸스크로 돌아가는 중이라 착각한 코르녜프는 신분을 감춘 비밀경찰국 요원이 비신스키를 만난 일로 반색하자 엷은 미소로 화답한다. 성급한 신념과 엘리트 지향. 코르녜프는 애초 무능력하고 준비가 부족했을까.
여기서 시대의 실패가 코르녜프와 같은 인텔리겐치아의 역량 탓이라고 말할 리 없다. 코르녜프의 역량보다 특정 시공간이 지닌 불합리함의 크기가 거대했을 뿐이다. 다소 연약하고 서툰 게 잘못일 순 없다. 당연히 그걸 이용해 괴롭히는 쪽과 구조가 문제인 건 말할 것도 없다. 오히려 젊음이 배태한 성급함과 불안감, 어수룩함은 원숙한 체념이 지배하는 세계를 흔드는 데 쓰일 유일하게 남은 판돈일지 모른다. 작품은 그 마지막 무기마저 유려하고 깔끔히 소거되는 세계의 참상을 파고든다. 실패는 어느 선까지는 연속할 수밖에 없다. 선과 정의를 믿고 행동하는 군중이 악의 구조에 균열을 낸 사례는 분명히 있다. 하지만 악의 구조가 붕괴하는 건 자멸로 귀결하는 태생적 한계 탓이 더 크다. 코르녜프가 두 번째로 들어선 뒤 닫힌 붉은 문의 견고함이 말해주듯 선의의 충격만으로 구조가 초반에 무너지는 경우는 드물다. 대개 구조가 약해진 후에야 균열이 빛을 발했던 기억이 더 많다. 그렇다면 작품은 무얼 말하고 싶은가. 선과 정의의 행동은 쓸데없다고 낙담하는가. 작품은 견뎌야 할 시간이 있다고 주장한다.
무수한 스테프냐크와 코르녜프는 임계점이 오기 전까지 도돌이표처럼 반복될 것이다. 한때 젊었던 스테프냐크들은 노쇠할 코르녜프들에게 똑같은 말을 할 것이다. 네가 진정한 ‘누구’이고 정직한 ‘무엇’이라면 맞서라고 채근할 것이다. 지령을 받은 코르녜프들은 다시 악의 구조 앞에서 제지당하고 멈춰 세워질 것이며 절망의 눈빛을 보여줄 것이다. 작품은 고난의 시기는 숙명과 같이 언제든 오며 반복할 것이란 진실을, 스테프냐크와 코르녜프로 이루어진 사이클에서 가장 희망찬 순간인 젊음을 절단면으로 드러내 보인다. 희망을 말하는 게 아니다. 절망을 견디라는 주문이다. 그러니 관객이 한해에 몇편씩 나오는 일련의 영화를 찾는 건 무기력을 호소하기보다 다중이 공동으로 절망을 인내하려는 방안의 일환으로 봐야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