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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홍열의 촬영 미학] 결여의 색, 충만한 사막, 박홍열 촬영감독의 <파리, 텍사스>

<파리, 텍사스>

물체의 색은 빛이 어떤 표면에 닿아야 드러난다. 모든 색은 단 세 가지 색으로부터 만들어진다. 하지만 색을 구성하는 삼원색은 빛과 물체에서 서로 다른 체계를 따른다. 빛을 구성하는 삼원색과 물체를 표현하는 색료의 삼원색은 다르다. 빛은 RGB 삼원색으로 구성되고, 셋을 더하면 투명한 화이트(흰빛)가 된다. 색이 더해질수록 밝아지기 때문에 빛의 가산법이라고 한다. 색료는 CMY 삼원색으로 구성되고, 셋을 더하면 블랙(검은색)이 된다. 색이 더해질수록 어두워지기 때문에 색료의 감산법이라고 한다. 일반적으로 영화는 빛의 가산법으로 작동한다. 빛을 더해 공간을 채우고 인물을 드러낸다. 그러나 <파리, 텍사스>는 그 반대로 나아간다. 이 영화에서 색을 본다는 것은, 빛이 온전히 주어지지 않는 순간이다. 빛에서 무언가 빠져나간 자리에 색이 생긴다. 도시의 빛들은 하나로 모인 빛이 아니라, 서로 분리된 채 존재하는 색들이다. 네온사인의 블루와 레드, 형광등의 그린, 거리 가로등의 엘로. 이 빛의 색들은 모든 색이 모여 있는 빛이 아닌 결여의 색으로 나타난다.

보통 사막은 공허와 결핍으로 읽힌다. 하지만 <파리, 텍사스>의 사막은 공허한 물리적 공간이 아니라, 시각적 색으로 충만한 공간이다. 영화는 트래비스가 사막을 무작정 걷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그 행위는 빛을 향해 나아가는 여정처럼 보인다. 사막의 빛은 화이트, 투명함 그 자체다. 이 투명함은 비어 있는 것이 아니라 모든 색이 합쳐진 상태다. 트래비스는 그 모든 색 속에서 걷는다. 도시와 사막에서 색을 보고 감각하는 이는 트래비스뿐일지도 모른다. 그가 지니고 다니는 사진 한장이 있다. 텍사스 사막 한가운데 ‘파리’란 간판이 보이는 사진이다. 그에게 ‘텍사스의 파리’는 흩어진 가족이 다시 모여 집을 짓고, 함께 살기를 꿈꾸는 공간이다. 사막의 빛처럼 충만한 장소다. 사람들은 사막 가운데 있는 그 파리를 이해하지 못하고, 믿지 않는다.

<파리, 텍사스>에서 강렬한 색채들은 역설적으로 무언가 소실된 상태의 증거다. 빛을 구성하는 원색들이 비정상적으로 분리되어 등장한다. 레드, 블루, 그린은 한 화면 안에서 빛의 색으로, 혹은 미술의 색으로 제각기 흩어져 있다. 서로 만나 합쳐져야 비로소 화이트(충만)가 될 수 있는 색들이 프레임 안에서 고립된 채 서로를 밀어내는 것이다. 이 영화에서 색은 상징이나 인물, 분위기를 설명하는 도구가 아니다. 색은 무언가가 빠져나간 자리다. 남은 것은 감정이 아니라, 비어 있는 흔적이다. 곁에 있지만 닿지 못하는 관계의 자국이다.

<파리, 텍사스>

<파리, 텍사스>는 이렇게 분리된 색들, 공간 안에 흩어져 있는 결여를 따라 다시 그 색들을 향해 나아가는 여정을 그린다. 도시의 자연광조차 삼원색이 흩어진 결여의 상태다. 도시의 석양은 레드와 그린이 분리되며 나타나고, 해가 지면 블루만 남는다. 석양과 여명의 빛은 단순한 자연광이 아니라, 사라지는 시간 그 자체로 남는다. 트래비스는 도시의 결여된 빛에서 벗어나, 상실된 자신의 조각들을 채우기 위해 그 모든 빛이 공존하는 사막 안에서 4년을 머물렀던 것이다.

투명한 빛의 색은 불투명한 물체의 색으로 전이되어간다. 대표적인 색이 레드다. 영화의 시작, 사막과 함께 트래비스는 빨간 모자를 쓰고 등장한다. 사막을 걷는 그는 롱숏 안에 작게 보이지만 빨간색 모자 때문에 작게 인지되지 않는다. 도시 안에 정착한 트래비스는 항상 빨간 셔츠를 입고 있다. 트래비스와 그의 아들 헌터가 엄마 제인을 찾으러 휴스턴에 갈 때 헌터도 빨간색 옷을 입고 있다. 그들은 제인을 찾기 위해 59년형 파란색의 포드 란체로를 샀다. 고속도로에서 빨간 차를 발견하고 ‘엄마’라고 외치며 트래비스와 헌터는 그 차를 쫓기 시작한다. 거대한 흰 벽 앞에 주차한 빨간색 차를 발견한다. 흰 벽 프레임 안으로 트래비스의 파란 포드 란체로가 들어온다. 빨간 차 안을 들여다보는 두 사람이 운전석에 버려진 닥터 페퍼 캔과 초코바 껍질을 본다. 둘 다 붉은색이다. 이 사물은 차 주인의 얼굴이기도 하고 그들이 찾는 제인의 얼굴이기도 하다. 빨간 차 안의 빨간 쓰레기는 일종의 ‘얼굴’처럼 배치된다. 인물의 부재가 이미지로 드러난 결과다. 이는 하스미 시게히코가 오즈 야스지로의 영화에서 논의한 사물 숏과 맞물린다. 다음 컷, 흰 벽 반대편에 커다란 파란색 건물이 보인다. 파란 배경 앞에 붉은 셔츠를 입고 서 있는 트래비스와 헌터가 한층 강렬하게 돌출된다. 강한 색 대비는 한색을 강조하기보다 공허와 결여의 상태를 드러낸다. 트래비스는 헌터를 파란 차에 남겨둔 채, 홀로 파란 건물, 파란 문 안으로 들어간다.

파란 건물, 파란 문 안으로 들어간다. 이 장면은 <파리, 텍사스>의 핵심이다. 트래비스가 파란 문을 열고 들어가 처음 만나는 공간은 그린 빛이다. 트래비스가 계단을 발견하고 안으로 올라간다. 카메라는 컷을 나누지 않고 그를 따라 움직인다. 트래비스는 자기 너머의 강렬한 레드를 향해 성큼성큼 올라간다. 블루, 그린, 레드 빛의 삼원색. 그 색들이 차례대로 나타나는 장면이다. 하지만 그 빛들은 서로 연결되지 못한 채 나뉘어 있다. 블루와 그린은 문이라는 공간으로, 그린과 레드 사이에는 블랙이 서로를 나누고 있다. 트래비스의 걸음은 영화 초반 사막에서와 완전히 달라져 있다. 그는 단절된 색들을 가로질러 특정한 방향(레드)을 향해 걸어간다. 그가 들어온 공간은 스트립 클럽이다. 모든 빛이 붉다. 붉은빛 공간 속에 붉은 옷을 입은 트래비스가 들어선다.

이때 붉은색은 인물이 사라진 뒤 남은 느낌이 한곳에 머물지 못하고, 사물들 위로 옮겨가 퍼져 있는 방식이다. 붉은빛 안에서 붉은 옷, 같은 붉음 속에서 차이들은 존재할 수 있을까? 같은 붉은색 안에서도 차이는 분명히 존재한다. 트래비스는 그 차이를 본다. 트래비스를 따르던 카메라가 그가 바라본 곳으로 향한다. 공간 안쪽 블루 빛이 나오는 공간이 보이고 그 공간 너머 다른 공간은 그린 빛이다. 이 공간에서도 색은 분리되어 있다. 카메라가 다시 그의 얼굴로 돌아오면 반대편 얼굴에 짙은 블루 빛이 닿고 있다. 클럽 안으로 걸어 들어가는 트래비스, 옅은 레드 원피스를 입고 있는 여성을 발견하고 다가선다. 그 안은 그린 빛이다. 쫓겨나는 트래비스는 다른 공간으로 내려간다. 그곳은 블루 빛이다. 트래비스가 내려온 공간은 블루 공간에 노란 칸막이들로 여러 방으로 나뉘어져 있다. 그는 한 방으로 들어간다. 방 안에는 전화기와 유리창이 보이고 창 너머 공간은 블루 빛이다.

<파리, 텍사스>

창 너머 한 여인이 들어와 트래비스와 마주 앉아 대화를 시작한다. 트래비스는 그녀가 보이지만 그녀는 트래비스가 보이지 않는다. 그녀는 트래비스를 향해 이야기하지만, 시선은 트래비스가 아닌 모서리를 향하고 있다. 트래비스는 그녀에게 왜 자신을 보지 않고 이야기하냐고 묻는다. 그녀는 트래비스가 보이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녀가 제인이 아님을 확인한 트래비스는 다른 방으로 이동한다. 이 방은 반대로 창 안쪽이 블루다. 트래비스의 옷은 레드, 수화기는 그린처럼 보인다. 빛의 삼원색이 사물에 투영되어 화면 가득 펼쳐진다. 창 너머 한 여인의 목소리가 들려오고 이어서 그녀의 방 안이 보인다. 빨간 전화기, 주황색 커튼, 소파, 갓등. 앞서 봤던 핑크색 옷의 여인이 붉은색 짙은 립스틱을 바른 채 들어와 앉는다. 빛은 백색광이지만 미술과 의상의 색은 온통 레드다. 빛이 아닌 사물의 색과 미술의 색이기에 더 선명하게 보인다. 그 방에 있는 여인은 트래비스가 찾던 제인이다. 투명한 빛의 색이 불투명한 사물의 색으로 전이되어 제인의 방 가득 배치되어 있다.

이 장면은 앞선 방과 달리 두 공간을 나누는 유리창이 처음에 보이지 않는다. 카메라는 인물을 비출 때 각자의 방에 들어가 제인 앞에서, 트래비스 옆에서 단독 숏을 택한다. 제인은 정면을 바라보지만 눈의 초점은 정면이 아닌 어디를 볼지 모르는 듯해 보인다. 분리되었던 두 인물이 만났지만, 카메라는 둘을 한 프레임에 담지 못한다. 색이 아직 하나로 모이지 못했듯. 두 사람의 대화가 어느 정도 지난 후에야 그녀가 창에 비친 자기 얼굴을 바라보는 장면이 나온다. 다음날 다시 제인을 찾은 트래비스. 제인의 방 사물의 색은 블루로 바뀌어 있다. 짙은 블루 계열 옷을 입고 들어온 제인, 트래비스가 있는 공간의 빛은 투명한 블루. 불투명한 블루와 투명한 블루가 만난다. 하지만 트래비스는 돌아앉는다. 창 너머 제인이 보이지만 등을 돌리고 과거의 이야기를 한다. 이야기를 마친 트래비스가 돌아앉으면 그녀도 창 앞에 앉는다. 그녀가 창 앞으로 가까이 올수록 빛을 받지 못하는 그녀의 얼굴은 어두워지고 사라진다. 창 너머 제인의 얼굴 윤곽 위로 트래비스의 반사된 얼굴이 겹치며 둘이 하나가 된다. 트래비스는 그녀에게 방 불을 끄라고 말한다. 그녀도 이제 트래비스를 볼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그녀의 얼굴이 트래비스에게 보이지 않는다. 트래비스의 시선도 앞선 제인처럼 다른 곳을 보고 있다. 아니 어디를 향해야 할지 모르는 듯하다. 모든 빛이 통과하는 유리창 앞에 두 사람이 마주 보고 있지만 서로는 서로를 볼 수가 없다. 제인이 트래비스를 볼 수 있게 되었지만, 그녀도 돌아앉아 그를 보지 않은 채 자신의 이야기를 한다. 보이지만 보지 못하고, 보여도 마주 앉지 못한다. 한쪽은 보지만 반대편은 보지 못한다. 관객은 두 사람을 보지만, 서로는 서로를 보지 못한다. 빛의 색도 마찬가지다. 우리 주변에 존재하지만 잘 인지하지 못하거나 보지 못한다. 존재하지만 없다고 믿기 때문에, 우리는 그 존재들이 있어도 알 수 없는 상실과 결여 안에 놓인다. <파리, 텍사 스>의 이미지는 이렇게 보임과 보이지 않음의 비대칭 위에 놓여 있다. 도시의 빛도 마찬가지다. 네온사인의 붉은빛과 푸른빛은 분명 화면을 채우고 있지만, 그것이 무엇을 드러내는지 우리는 쉽게 인지하지 못한다. 그래서 이 영화의 도시는 화려하기보다 공허하다. 연결된 것 같지만 단절되어 있다. 색은 넘쳐나지만, 인물들은 서로를 끝내 보지 못한다.

일상에서 형광등은 차가운 녹색 빛을 띤다. 하지만 우리는 인지하지 못한다. 눈으로 보면서도 뇌에서는 화이트 밸런스를 맞춰 ‘하얗다’고 믿기 때문이다. 색이 있는데, 우리는 없다고 믿거나 외면하며 산다. 현대인의 상실도 그와 같지 않을까. 결여된 빛을 보면서 충만하다고 착각하고 살고 있다. 이 영화는 단절된 채로 존재가 지워진 색을 스크린에 강제로 새겨놓으며, 우리가 잃어버린 것이 무엇인지 직면하게 만든다. 1984년의 <파리, 텍사스>이후 40년, 우리는 여전히 색이 가득한 도시에 살고 있다. 여전히 연결되지 못한 채 살고 있다. 우리는 무엇을 보고 있고, 무엇을 끝내 보지 못하고 있는가.